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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42)<br>분청철화어문병편쏘가리 문양 도편 한 점 없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계룡산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조선 왕도로서의 도읍지를 생각한다면 무학대사를, 민속신앙의 터전을 염두에 둔다면 신도안을, 마음이 아픈 이야기가 가슴을 적셔온다면 달래고개의 전설이 연상되지 않을까. 그러나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분청철화가 눈 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그만큼 계룡산 밑 학봉리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는 분청철화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무안이나 운대리 같은 곳에서도 분청철화가 간혹 보이기는 히자만 미미한 것이어서 계룡산이나 학봉리로 지칭되는 이곳의 대규모 분청철화와는 어짜피 비교 자체가 남새스러운 일일 것이다. 계룡산 밑 학봉리 가마터에서는 물론 분청만 만든 것은 아니다. 흑유도 있고 백자도 있다. 하지만 분청철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곳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에서는 분청철화를 얼마나 만든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막연하게 많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등을 통해 밝혀진 자료를 보면 막연히 짐작했던대로 그 수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출토품의 시문기법을 살펴보면 상감이 0.46 인화가 0.60 조화가 0.04 귀얄이 9.59에 분청철화가 무려 13.36프로나 되니 압도적으로 엄청난 수량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 하면 분청철화가 연상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계룡산에서는 귀얄기법과 더불어 분청철화가 가장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기종으로는 대접 접시 완 종지 등의 반상기류와 병, 호, 항, 대발, 제기, 마상배, 장군, 편병, 자라병, 연적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병과 항의 수량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 기종에 시문된 분청철화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물고기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고기 두 마리를 엇갈려 배치하는 쌍어문, 연못 풍경 속의 물고기, 등용문과 관련된 어룡(魚龍)과 파룡(波龍) 등이 그 것인데 몇 줄의 가는 선으로 날카롭게 펼처진 등지느러미와 뾰족한 주둥이가 특징으로 추상적인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앞에서 지적한 계룡산 분청철화어문의 특징들과는 맛을 달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수초 밑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머리와 앞지느러미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선은 둔탁하고 형태도 세련되지 못해 못 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오히려 독창적인 분청철화물고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면 나만의 독단일까. 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안쪽으로 한 줄기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어 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 추상문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계룡산 분청철화의 쏘가리 문양 도편 한 점 없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을 이야기 하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서운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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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무안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06/01-02)■행사명: 2024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주최 : 무안군, 민주평화통일자문 무안군 협의회,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주관 :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후원 : 보건복지부, 전라남도, 전남교육청, 무안신문 ■장소 : 무안승달문화예술회관 ■날짜 : 2024-06-01∽02 ■경연일정 ■예 선 – 2024년 06월 01일 (토) 승달문화예술회관 동영상 심사 ■본 선 - 2024년 06월 02일 (일) 10:00 ~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결 선 - 2024년 06월 02일 (일)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시상식 - 2024년 06월 02일 (일) 16:30 승달문화예술회관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참가 자격 ■청소년부 1.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생이나 19세미만 까지 청소년부로 참여할 수 있음. 2. 만18세 이상일 경우 참가 당일 학생 신분 이여야하며 이를 증빙할 수 있어야함. ■일반부 19세 이상인 대학생 또는 일반인 장애인국악대제전은 참가부문 장애에 한합니다 (010-9211-7222 문의 부탁드립니다) ■ 참가신청 2024. 04. 01. - 05. 29.(오후 6시까지 / 6시 이후는 접수 불가 합니다.) ■우)58559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13 ☏ 061 - 285 - 1151 / 010 - 9211 - 7222 ■메일 : wlseh53@hanmail.net 팩스접수 061 - 285 - 1152 / 0508-923-7227 (장애인국악대제전 전화접수 가능하나 영상은 메일로 첨부하여야합니다.) ★단 장애인국악대제전 예선은 영상심사로 진행되오니 착오없이 영상을 메일로 첨부하여주십시오. 인사없이 진행되며 예선 경연시간은 청소년부 5분 / 일반부 7분에 한하여 촬영부탁드립니다. 영상 첨부 또한 05월 29일 오후 6시까지 들어오지 않을 시 기권으로 처리됩니다. ■ 지정고수 ■장애인 청소년부- 예선⦁ 본선 각 50,000원, 결선 무료 ■장애인 일반부 - 예선⦁ 본선 결선 각 50,000원 지정고수를 이용하실 분은 참가신청서에 신청. (농협 351 - 0361 - 6391 – 23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2024년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시상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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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무안전국승달국악대제전(06/01-02)■대회목적 : 본 대회는 대한민국의 국악명가 강윤학家의 명인⦁명창 이신 강용안(최초로 전통창극과 창작창극을 연출하신 창극의효시, 창극으로 일제에 맞서 이인직의 은세계가 아닌 최병두타령으로 예술혼을 지킴), 강태홍(중요무형문화제 강태홍류 가야금창시자), 강남중(국악인으로 유일한 독립운동의 숨은애국자(상해임시정부의 구국이념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으며, 백범(김구)선생으로부터 悟峴(오현) 호를 받음, 일본에서 애국 운동을 하시다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청각 상실.) 선생들의 정신을 기리고, 전국의 국악인들을 발굴. 육성하여 권위 있는 신진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정착시키고 우수한 국악 인재를 발굴하여 훌륭한 전통 국악의 전승 보전과, 21세기를 맞아 우리 전통예술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과 세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자함. ■행사명: 제22회 무안 전국 승달국악대제전 ■주최 : 무안군,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주관 :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후원 : 행자부, 문체부, 교육부, 농림부, 전라남도, 전남교육청, 무안신문 ■장소 : 무안승달문화예술회관 ■날짜 : 2024-06-01∽02 ■ 경연일정 예 선 – 2024년 06월 01일 (토) 10:00 ~ 18:00 승달문화예술회관 일원, 본 선 - 2024년 06월 02일 (일) 10:00 ~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결 선 - 2024년 06월 02일 (일)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시상식 - 2024년 06월 02일 (일) 16:30 승달문화예술회관 ■ 승달국악대제전 참가자격 전국 초, 중, 고, 대학, 일반, 외국인 고법 신인부, 판소리 신인부, 무용 신인부는 대학생 및 전공자 참여 불가 판소리 노인부, 고법 노인부는 65세 / 1959년 출생자부터 접수가능 본 대회 노인부, 신인부 종합대상 수상자는 수상 부서에 접수 불가. 단, 전년도 대회에서 동일부문 최고상(대통령상)수상자는 접수 불가. ■ 참가신청 : 2024. 04. 01. - 05. 29.(오후 6시까지 / 6시 이후는 접수 불가 합니다.) 우)58559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13 ☏ 061 - 285 - 1151 / 010 - 9211 - 7222 메일 : wlseh53@hanmail.net 팩스접수 061 - 285 - 1152 / 0508-923-7227 (노인부∘신인부에 한해서 전화접수 가능) ■ 경연방법-본회의「운영(심사)규정」을 원칙으로 함. 학생부 : 예선⦁본선 무 장단 또는 고수 대동 (고수신청을 원할 경우 신청서에 신청하시거나 현장에서 신청가능) ■ 지정고수: * 학생부 - 예선⦁본선 각 50,000원, 결선 무료 * 신인 ∘ 노인부 - 예선⦁ 본선, 결선 각 50,000원 * 명인부 - 예선⦁본선 각 100,000 원, 결선 200,000 원 지정고수를 이용하실 분은 참가신청서에 신청. (농협 351 - 0361 - 6391 - 23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경연순서 : 예선, 본선「운영(심사)규정」을 원칙으로 함.(장애인부도 포함) ■ 경연시간 판소리 학생부 : 8분 신인부 : 8분 노인부 : 8분 명인부 : 10분 기악(관악, 현악) 학생부 : 8분 명인부 : 8분~10분 한국무용 학생부 : 5분~8분 신인부 : 6분 명인부 : 8분~10분 가야금병창 학생부 : 6분~8분 명인부 : 8분~10분 판소리고법 학생부 : 5분 신인부 : 5분 노인부 : 5분 명인부 : 8분 ■ 심사항목 무용 감정 30 기능 30 안무 30 무대매너 10 판소리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기악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가야금병창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판소리고법 박자 30 기능 40 자세 15 추임새 15 o 예선,본선 후 전체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 최하점을 뺀 후 점수를 합하여 가장 높은 점수부터 순위결정 o 결선 - 각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하여 높은 점수가 대상(1등:2점. 2등1점) o 동점일 경우 고학년 및 고령자 및 다수 참가자로 함, 모두 같을시 심사위원 회의를 거쳐 심사위원장이 결정한다. ■ 심사회피제 시행여부 : 해당사항에 체크 표시 ☑ 시행 미 시행 ■ 수상자의 사후관리 계획 :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무안 연꽃축제 메인무대 승달 국악 콘서트 초청공연 (매년개최하고있음)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개인발표회 후원 및 초청발표회 예정(후원신청 받고 있음) 개인 발표회 (대관료, 팜플렛 등 비용보조), 초청 개인발표회 (공연비 지급) 대통령상 수상자 심사위원 또는 판소리고법 명창 초청.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음반 발매예정. ■ 제22회 승달국악대제전 시상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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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7)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덤벙분청'에 대한 변명||"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얼른 생각하기에는 신분도 높고 지혜도 뛰어난 오키의 도공들이 만든 품위 있는 다기가 훨씬 뛰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의 잡기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일 것이다. 즉 밖으로만 모방할 뿐 안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이다.새삼스럽게 조선인처럼 가난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고 또한 잡기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맛에 사로잡힌 부자유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참된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직은 조작이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애의 상태에서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조선인의 장점을 이은 선어(禪語)를 빌려 말한다면, 지미(只縻)의 경지에서 만들었다는 점에 있으며,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것이 미묘한 갈림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과 그 예술'에서 말한 내용 일부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 2022)의 한 챕터에서 이를 베껴둔 것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 혹은 해명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내는 것이 달마도의 회화며 분청의 세계가 어찌 다를 것인가.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라 했다.불교의 공(空), 도교 자유의지의 표현 말이다.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에 표현되었으니 그 웅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오래전 내가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란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무안분청(광주,전남을 포괄하는 호명 방식)의 기능을 배태한 무안만(내가 새롭게 구상한 영산강과 인근 바다의 다른 이름)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 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무안만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과 지향 속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남도 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자기에서 무안만의 분청까지, 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정신 말이다.덤벙분청의 세계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6세기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세종 이후에는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에 이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된다. 16세기 이후 야마노우에 소지(山上宗二)가 조선의 분청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고 평한 것은,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다. 이중 무안만에서 가장 선호했던 기법이 덤벙과 귀얄문이다. 지면상 고(古)덤벙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해둔다. 더 자세한 얘기는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덤벙 채식(彩飾)은 도자기 장식에서 백색이나 색깔이 있는 흙물에 도자기를 덤벙 담갔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물에 어떤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다. 텀벙, 덤버덩, 덤벙, 덤벙덤벙, 덤버덩덤버덩, 담방 등의 용례가 있다. 하지만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자꾸 함부로 서둘러 뛰어든다는 뉘앙스의 '덤벙'이란 의미로 읽는 것은 단견이다. 담방담방이나 담방은 작고 가벼운 물건이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를 말한다.둥덩둥덩이나 동당동당과 같은 말이다. 남도민요 둥덩애타령이란 호명이 여기서 나왔다. 옹기 옴박지에 물을 절반쯤 채우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엎어 손으로 두드리면 동당동당 혹은 둥덩둥덩 하는 타악기 소리가 난다. 이를 '옴박지 장단'이라고 하고 특히 여인네들이 유희놀음을 할 때 이를 악기 삼아 노래했기에 '둥덩애타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덤벙은 '연못'의 방언이기도 하다. '웅덩이'를 '둠벙'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둠벙과 덤벙의 어원이 같다. 따라서 덤벙채색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덤벙댄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생태적이고 고풍스런 뉘앙스다. 예컨대 '덤벙주초'는 돌을 다듬지 않고 건물의 기둥 밑에 두는 주춧돌을 말한다. 다듬지 않아서 거칠지만 그 질감이 주는 친자연적인 미감에 의미를 두는 시선이다. 야마다가 무안의 분청을 황실의 국보로 찬양하고 야나기가 조선의 옹기와 도자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귄대가리의 정체지난 칼럼에서 나는 거시기 연대기를 말하며 귄의 정체를 해명했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선 결과가 다른 것을 변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지역에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땔나무꾼으로서, 적어도 누군가는 이 흐름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일종의 팬덤이었나? 생각 없이 덤벙대는 우둔한 자들이어서인가? 잘못된 행위를 극구 우김질하자는 게 아니다. 역사이래 거시기를 공유해온 사람들의 더불어 울림(共鳴)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지난 수 세기 동안 죽음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남도로 또 남도로 향했는가를, 또한 남도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수용하며 슬픔을 삭여냈는가를 말이다. 그래서다. 오늘 분청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시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낳게 한 원인과 과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오는 패배감에 대한 것이다. 두렵고 화가 나는 것은, 현 집권당 특히 남도지역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태도와 안이한 처신이다. 남도사람들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당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지 당신들의 안위를 위해 표를 준 것이 아니다. 이 지역 정치인들은 밖으로만 광주정신과 시대정신을 모방할 뿐 안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역사를 상고해보라. 남도사람들이 어디 단 한 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표를 몰아준 일이 있는가. 일본인들처럼 맛에 매달려 궁색하게 만들지도 않고 헛되이 치장하지도 않는다. 단 한 표 차로 졌어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이것이 게임의 원칙이다. 나중 호모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을 소개할 예정이지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는 것이 옳다. 요한호이징하는 그래서 종교와 전쟁도 놀이라고 했을 것이다. 경기에서 졌으면 '졌잘싸'로 변명하지 말고 협력하는 것이 정도다. 지금은 그것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할 일이다. 야나기에 비유컨대 여기가 미묘한 갈림길일까? 남도의 일당 정치인들에게 경고해둔다. 거시기의 연대를 몰상식하게 폄훼하면 나부터라도 가만있지 않겠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나라의 의를 위해 떨쳐 일어나고 시대정신을 견인해 나온 남도사람들의 시대정신과 귄진 감각을.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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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6)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초의와 차선고도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연인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일지 모르겠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초의선사가 일지암을 짓고 지은 시라 한다. 일지암을 아는 사람들은 이 시가 형용하고 있는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짙은 운무 출몰하는 비경과 초암에 앉아 차 한잔하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가. 대흥사 일지암이 지금은 운용의 묘를 살린 탓인지 여러 채의 절간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초암 곧 일지암에 있다.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각양의 인사들과의 교류가 낳은 총화라고나 할까. 여기에 초기 카톨릭의 숨겨진 영향까지 거론한다면 불선(佛禪)을 넘어선 유불선기(儒佛仙基)를 거론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초의는 본래 무안(당시에는 나주에 속함) 삼향 사람이다. 지금은 삼향에 초의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용운스님의 노력으로 일지암도 재현해두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이곳에 터를 잡고 주경야독하는 중이다. 나는 곧 출판되는 졸저에서, 무안만(남도만과 무안만에 대해서는 본 칼럼에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의 차와 이를 재구성할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정하고 '고양의 길'이라는 표제를 붙여 두었다. 불교 중심으로 차 문화가 확장되었고, 스님들 중심으로 차 생활이 보편화 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고양하는 첨단의 콘텐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간에 차와 명상, 힐링, 수련, 영성 등의 조합을 이룬 다종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사가 남긴 명선(茗禪)이라는 글씨가 그 행간에 있다.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준 호이기도 하다. 대개 이를 '차를 마시며 선정(禪定)에 든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문자 그대로 명(茗)은 차의 싹을 말하는 것이니 차를 마시며 선을 행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구체적인 차선고도의 루트나 프로그램을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차가 명상이나 요가, 이른바 마음수련에 있어 최고의 콘텐츠라는 생각은 부기해 둔다. 정민 교수의 작업에 기대어 차선고도(茶船古道)를 상상하다 중국에서 한해륙에 이르는 이른바 뱃길을 전제해본다. 초의에 앞선 차문화 정리의 맥락이기도 할 것이다. 정민이 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글항아리, 2018)는 차선고도를 설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지면상 몇 가지만 인용해 공부자료로 삼는다. "18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해금 정책이 풀리자 중국의 서남해안에서 북상하는 뱃길이 열렸다. 배를 통한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서남 연안에 중국 상선의 표착이 부쩍 늘어났다. 특별히 1760년 서해안에 표착한 중국 배에는 황차(黃茶)가 가득 실려있었다." 또 이덕리의 '기다' 중 '다설' 제3조에 남은 기록을 보고하고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에 차 파는 상선이 와서 온 나라가 그제야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았다. 이후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것이 하마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채취해서 쓸 줄은 모른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 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정민은 이외에도 박제가의 '북학의'를 인용하며 1760년에 왔다는 표류선의 존재를 보고하고 있다. 황차와 관련된 내용이다. 지면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1762년 11월 7일자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표류선 기사를 참고해도 좋다. 정민은 사흘 뒤인 11월 12일자 '승정원일기'를 인용하며 중국 표류인들이 가져온 황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류선 관련 기록에서 황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고군산진에 표착한 절강 상인의 배에 황차엽이 대량으로 실려있었고 당시 금주령 상태에 있던 조선에서 이 황차는 제사 때 쓰는 제주(祭酒) 대신으로 각광을 받아 수요가 갑작스럽게 급증하게 되었던 사정이 짐작된다." 이 시기 중국 남쪽 배들의 서남해안 표착이 상당히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금주령 하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황차가 특수를 누리면서 비로소 차의 존재가 조선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초의의 차를 가까이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덕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민의 연구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초의 이전의 이덕리에 대한 정보는 정민이 거의 유일하고도 상세하게 연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차마고도에서 차선고도까지 주지하듯이 차마고도(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Southern Silk Road)는 비단길보다 먼저 생긴 무역로이다. 중국의 윈난성, 쓰촨성에서 시작된다.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등지를 거쳐 실크로드로 이어진다.위키사전의 설명을 빌리면, 마방(馬幇)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말과 야크를 이용해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서로 사고팔기 위해 지나다닌 길이다. 차와 말만 사고팔았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통해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 졌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유럽까지 연결되기도 했다. 해발고도 4000미터가 넘는 험준하고 가파른 길이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길로도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2007년 KBS에서 6편으로 구성한 차마고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부터이다. 나도 여러 차례 윈난지역을 방문하여 관련 정보들을 갈무리한 적이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무역로라고 추정하는 길이기도 하다. 차선고도(茶船古道)는 이에 착안한 것이다. 광의의 차선고도는 멀리 중국으로부터 뱃길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항로 혹은 차도(茶道)를 말하는 것이고, 협의의 차선고도는 초의선사의 생가인 현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혹은 신기마을에서 출발하여, 어린 나이에 출가한 나주의 운흥사로, 다시 평생을 보낸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까지 이어지는 길, 나아가 강진, 보성, 하동 등을 연결해본 것이다. 지금은 뱃길이 막혀있지만, 물골이 있던 때를 상상하여 이 루트를 재구성한다면 틀림없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초의선사 생가 아래 오두막 하나 짓고 살면서 차에 대해 상고해나가는 중이다. 아마 초의선사가 고금의 중매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지만 차는 분청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일본인들이 국보급 예우를 했던 분청사기는 사실 남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생활 용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들이 분청이 가진 미학에 주목하였고 끝내 일본 최고의 다기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나무에 귀를 대고 들으니 곧 새싹이 올라올 듯하다. 아, 봄이로구나. 올해는 보다 어린잎을 따서 황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남도의 물길 따라 교우했을 옛 인연의 터에 앉아 그윽한 차향 맡는 것, 어쩌면 내게 주어진 과분한 소확행인지도 모르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선이 끝났다. 승자에게는 축하의 차 한 잔, 패자에게는 위로의 차 한 잔 건넨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역할이 있을 것이다. 혐오와 배제는 저만치 던져버리고 오직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 생각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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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봉 이매방의 삶과 예술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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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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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한·중·일 가면과 가면극' 총서 발간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일본·중국의 가면과 가면극을 담은 책 3권을 발간했다.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종대)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으로서 가면과 가면극의 우수성을 알리 위해 2022년부터 비교민속적 측면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의 가면 학술연구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학술연구사업은 총 3개년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간한 학술총서는 총 3권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 3국의 가면극 연구자 44명이 참여한 국제공동학술연구 프로젝트로 ‘북청사자놀음’등 한국 가면극 20종, ‘고토 카구라’ 등 일본 가면극 24종, ‘무안나희’등 중국 가면극 27종을 사전식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책들은 동아시아 3국 가면극 연구자 44명이 참여한 국제공동학술연구 프로젝트로 '북청사자놀음' 등 한국 가면극 20종, '고토 카구라' 등 일본 가면극 24종, ‘무안나희' 등 중국 가면극 27종을 사전식으로 배치했다. 책 '한국의 가면과 가면극'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가면극들을 중심으로 '북청사자놀음', '통영오광대' 등 한국 가면극 총 20건이 담겼다.한국 가면극은 사회 풍자극이기 때문에 그 성립 자체에서 중국이나 일본 가면극과 차이를 보인다. 양반·승려·처첩관계 등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한국 가면극의 큰 특징은 관객이 제3의 배우가 된다는 점이며 극한 대립이 아닌 공존과 화합으로 극이 마무리된다. 책 '일본의 가면과 가면극'에는 '고토 카구라', '고시키지마의 도시돈' 등 일본 가면극 24건이 실렸다. 일본에 대륙의 여러 가지 문물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백제인이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伎樂)은 사원에서 하는 가면극이자 일본 연극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민간의 제의에서도 신으로 분장하거나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은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의식적인 행위, 연극적인 동작을 하였으며, 이를 세련되게 하여 다양한 가면극을 만들어 갔다. 일본 가면극은 귀족이나 무사 등 지배계급에 의해 발전한 기가쿠멘, 부가쿠멘 등과 민간에서 발전한 사루가쿠멘. 민간 축제가면, 앙가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지배층 중심 가면극은 예술적 경향이, 민간 중심 가면극은 민속연희적 경향이 강하다. 책 '중국의 가면과 가면극'에는 '무안 나희', '산서성 삭주 새희' 등 중국 가면극 27건이 담겼다. 중국 역사에서 가면을 사용한 퍼포먼스의 사례는 주(周)나라 때의 나례(儺禮)부터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국의 가면극들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중국 가면극을 지리적·환경적 요인에 따라 6개 문화권으로 나눠 설명한다. 위진남북조부터 당송시대까지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문물과 종교 그 가운데서도 불교 영향으로 발전했다. 송나라 이후 명청시대를 거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간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박물관은 "내년에도 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가면극을 조사하고 국제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수준 높은 학술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한 결과물을 내년에도 연구총서로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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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기후위기와 노아의 방주 민주·비민주 담론, 극한투쟁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 성장·개발 담론을 공생·공존 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가 절실하다 무안군 무안읍 매곡리 도깨비굿 이야기를 다시 소개한다. 무안과 함평 일대의 명산이라는 보평산 아랫마을이다. 보평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봉수대가 있다. 보평산과 감방산 사이에 있는 능성에는 용굴샘이 있어 명산 보평산의 풍수 스토리를 완성해준다. 이 물이 마르거나 마르지 않거나를 가지고 한해의 기후와 운수를 점쳤다. 누군가 몰래 묘를 쓰는 일이 발생하면 이 샘의 물이 말라버린다. 보평산은 명산이고 용굴샘은 그를 보전하는 상징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 산에 묘를 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자손들만의 발복을 위해 몰래 묘를 쓰는 자들이 있다. 도장(盜葬) 혹은 암장(暗葬)이라 한다. 그럴만한 능력과 사회적 부를 거머쥔 자들이다. 이런 경우 마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본 지면에 여러 번 소개했듯이 도깨비굿을 한다. 고을의 여자들이 호미와 낫 등을 들고 보평산을 뒤진다. 결국은 몰래 쓴 묘를 발견하고 파헤친다. 유골들을 흩뿌려 버린다. 그래도 묘지 임자가 되었건 문중이 되었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명산대천은 공동체의 것인데 마을 사람들 몰래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뭄이나 기근 특히 역병의 원인을 발복이나 사회적 권력의 독점 때문이라고 진단했음을 알 수 있다. 졸저 (다ᄒᆞᆯ미디어, 2021)에 자세하게 소개하고 분석해두었다. 도깨비굿은 기울어진 운동장, 극단으로 흐른 생태적 위기, 사회적 위기를 전복(顚覆)하는 행동의 은유다. 아니, 불순한 기운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어 균형을 회복하려는 혁명이다. 기후위기와 문명의 상관글로벌 경제전문가 10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을 기후에너지 캠페이너 정상훈이 소개해두었더라. 일부 내용을 여기 인용해둔다. 설문의 요지는 지금 우리 세계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93%가 '기후위기'라고 답했다. 빈곤 84%, 물 부족 79%, 전염병 78% 등으로 이어진다. 경제전문가들이 왜 기후위기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을까? 정상훈은 이렇게 분석했다. "지난 2016년 세계은행은 기후변화를 방치하면 2050년까지 158조 달러(18경 5천 729조 원)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한다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 2020년 우리나라 GDP(1조 6240억 달러)보다 100배 가까운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도 2021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통해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기후변화 대응 실패 등 기후 관련 문제가 '인류에게 실존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극단적인 기상현상이나 경제 시스템에 영향을 끼쳐 막대한 손실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러면서 기후위기 대응 최선책은 재생에너지의 확대라고 진단한다. 경제뿐이겠는가. 문화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엘스워스 헌팅턴의 (민속원, 2013)에 의하면, 기후와 문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며 이렇게 말한다. "전 세계 대분의 지역들은 인구가 상당히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불리한 경제적 변동이 발생하면 이는 곧 곤궁과 질병, 그리고 높은 사망률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활동적이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이주를 택하기도 한다. 경제적 곤궁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아마도 날씨 혹은 기후 변화(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흉작을 초래하거나 동물들이 먹고 마실 풀과 물을 부족하게 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곤궁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요를 불러오며, 이것은 다시 이주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으로 부득이하게 이주한 사람들은 열악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숫자는 계속 감소하여 오직 특별히 우월한 자질을 지닌 소수의 집단만이 선택적으로 살아남는다." 끔찍하지 않은가? 예컨대 조선후기 경신대기근처럼 말이다. 만약 그러할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지구별의 어떤 땅이 있어 이주할 수 있단 말인가. 빌게이츠는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매년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510억 톤을 2050년 선진국부터 '순 제로net zero'로 만들자." 여러 가지 정답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이다.가치관의 거대한 전환기, 진보의 끝자락에 서서여성 전유의 문화적 혁명이라는 도깨비굿, 그 문명적 은유를 새삼 반추해본다. 구마 겐고와 미우라 이쓰시는, 대담으로 엮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위대함, 고상함, 고층을 지향하는, 즉 '위에서의 기준'을 들이댄 건축을 선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저층, 저자세, 작음, 저탄소, 낮은 가격 등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속, 높은 마력을 선호하던 시대에서 속도가 느려도, 크기가 작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보의 끝, 진보의 종말이다. 산업, 기술적인 의미에서 진보의 끝만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형식까지 포함한 진보, 정확히는 진보라고 여겨져 온 모든 것이 막을 내린다는 의미다. 가치관의 근대화가 막다른 곳에 다다른 거대한 전환기다." 명문대학 졸업자, 부유한 집안 출신, 미모가 출중한 자 등을 경외하거나 선호하는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꼴지들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내리달리는 그 가속을 멈춰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철학가들, 사상가들이 이를 진단하고 주문했다. 예컨대 김지하가 내다봤던 문명사적 전환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율려와 동학의 전망 모색 등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비전의 재구성을 도모할 때가 아닌가 싶다. 비유컨대 개발 지향적이고 성장 우선적인 혹은 남성성으로 비유되는 진보담론의 해체가 답일 수 있다. 민주 비민주의 담론이나 극한투쟁을 뛰어넘는, 생태와 반생태 아니, 삶과 죽음의 담론이자 필사의 투쟁 아니겠는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물과 불의 심판에 준비했던 노아의 방주 같은 것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방주를 만들 마지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른바 도깨비굿이다. 성장과 개발 담론을 공생과 공존담론으로 뒤집어엎는 선한 에너지 말이다.기후위기시대, 노아의 방주목포산돌교회 김경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 단 한 사람을 남겨뒀다. 그가 바로 '노아'다. 노아란 이름의 뜻은 '멈춤(Stop)'이다. 아크 노아(오직 노아), 이것이 죄악으로 치달았던 세상을 향해 던진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물 심판뿐이겠는가. 불 심판 또한 마찬가지다. 성장과 개발을 진보로 여긴 인류가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기후위기 시대, 더 이상의 성장과 개발은 안 된다고 'No'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노아'란 뜻이다. 거대한 자본과 반생태적 정치권력의 카르텔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말이다. 이들이 생각하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것들,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방주(方舟)'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 설령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될지라도 '아니오'하며 방주를 만드는 이, 이것이 어쩌면 김대중 대통령이 말했던 '행동하는 양심'의 현재적 버전일지 모른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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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14장(애국가) 작사 배경으로서의 활동상윤치호는 1898년 이종일·남궁억·사촌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京城新問) 창간에 참여했다. 이 후 학무아문참의를 거쳐 1898년 7월 8일 다시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7월 22일 국왕에게 부패 관료들을 축출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황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획책하려 한다”는 모함을 당했다. 한편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통역을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도와주었다. 또한 부친을 설득하여 적당한 토지를 내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이런 입장임에도 가장 가까워야 할 미국 선교사에게마저 그는 은근히 무시와 모욕을 당하곤 했음에 처음에는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내심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하거나 반감을 품게 되었다. 1899년 1월 외직으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德源府尹) 주임관 1등으로 부임하였다. 중앙 정계에서 윤치호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후 원산감리로 부임한 뒤, 1900년 6월 삼화감리사 겸 삼화부윤, 이듬해 7월에는 다시 함경남도 덕원감리사 겸 덕원부윤으로, 이어 원산항재판소 판사에 재임명되었다. 처음 덕원 감리라는 외직으로 보낸 것이 조병식 내각이 중앙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임은 독립협회 시대의 정적이던 보부상들을 비밀로 파송하여 동정을 살피게 했다는 사실에서 확인 된다. 주목하는 것은 이 암행 결과인데, 나중에는 암행어사까지 출동시켜 '애민태과 손실정체(愛民太過 損失政體)'라는 죄명으로 봉고파직을 시켰다는 점이다. 이후 1902년 7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7월 12일 겸 삼화항재판소판사(三和港裁判所判事)로 발령받았다. 1902년부터는 기독교 남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이 경성부 종로방 고간동에 세운 캐롤라이나 학당의 후견인이 되었다. 1903년(광무 6년) 1월에는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 일대의 민생을 시찰하였다. 1903년 1월, 함경도 안핵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도 함흥에 파견되었고, 7월 천안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광산 채굴을 하며 조선인을 함부로 구타하던 백인 사업가를 유창한 영어로 호통을 쳐서 그 횡포를 막아주었다. 1904년(광무 7년) 2월, 전라남도 무안감리(務安監理) 겸 무안군수로 발령받았다가 3월 12일 다시 외무부협판 겸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있는 동안 러·일 양국의 각축을 보면서 인종적 차원에서 일본인들의 '동양평화론'과 일맥상통한 '극동 3국 제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윤치호는 중앙 정계에서 좌절된 민중을 위한 개혁정치의 이상을 지방에서나마 실현시키고자 진력하였다. 그러나 민권사상과 참정권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황제에 대항하려는 역적 집단으로 보는 민중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내각의 외무부협판에 임명되어 다시 중앙 정계로 불림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적인 정치체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그 이념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유교(성리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1904년에는 잠시 군부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1904년 3월, 일본의 특파대사 영접단의 단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8월 에는 외무부대신이 공석이 되자 그 서리사무에 겸임되었다. 1904년 김규식, 이상재 등과 함께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8월 외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였다. 12월 정부의 관제 개정소 의정관(官制改正所議政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2월 재혼한 아내 마수진(馬秀珍, 1871~1905)과 사별하였다. 그해 5월 외무협판에서 외무부대신 박제순의 사퇴로 그 서리를 겸임하였다. 이 시기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 조정에서는 민영환 등과 미국인으로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윤치호는 1905년(광무 8년) 9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는 " 일본의 괴로운 노예제 하에서 한국인들은 동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한 폭정의 디딤돌이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에 의한 압제를 예상했다. 1905년 황성 YMCA 기독교청년회 부회장에 취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의 독립은 오늘 오전 1시 또는 2시경에 조용히 사라졌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러나 정부는 다시 외부대신 서리에 임명했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이완용 내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1월, 일본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2월에는 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그 날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5년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역으로 그가 갑신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친밀했던 점을 들어 비난했다. 윤치호가 을사조약 반대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먹고 공화제를 획책한다는 흑색선전을 한 것이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自強)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윤치호는 YMCA 청년회 활동에 매진하였다. 청년회 활동과 교육, 강연 활동에만 전념한 것이다. 1905년부터 경성부에 설립 예정이던 대한도서관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과 부지 마련에도 참여했다. 발대식부터 각 준비과정에 관여한 인물들을 당시 황성신문 기사에서 찾아보면 윤치호 외 16명이었다. 대한도서관 개관 기념식 축사 낭독에서 "경성은 물론 각 산골과 촌락까지도 도서관이 보급되고 책 읽는 문화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1906년 3월, 도서관 평의회에 참여하고, 도서관 운영위원 겸 도서관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황성기독교청년회 부회장으로 재선되었다. 1906년 3월에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強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이에 반대운동을 펴다 해산되어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6년 5월 대한제국 정부의 일본 유학생 감독(日本留學生監督)에 임명되었다. 10월에는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학부 대신(學部大臣) 이완용의 상소로 일본 유학생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다. 후임자는 그의 사촌인 윤치오(尹致旿)가 되었다. 1906년 5월 이능화와 장지연 등과 함께 승려들이 세운 명진학교(明進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06년 10월 한영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미국 유학시절에 후원을 받았던 캔들러 박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문을 구하였다. 캔들러 박사는 학교 건립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며 기독교 신학 학교, 혹은 기독교 계열 학교 설립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답장에서 "기술과 상업을 가르치는 실업학교의 건립이 먼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노동이 수치(羞恥)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미래는 기술과 노동에 있다는 점과 기독교는 일을 하고 악습과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상, 종교로서 필요한 것을 주입”시키려 했다. 드디어 1906년 10월, 윤치호는 오랜 꿈이었던 학교설립,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고 원장이 되었다. 바로 이 때 첫 해 소규모의 입학생들을 위해 프린트본 ‘찬미가’(초판)를 발행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데 기여하였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의 '실력배양운동'에 동의하여 신민회의 회장을, 안창호는 부회장을 맡았다.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동휘(李東輝)·전덕기·김구 등의 주도하였다. 7월에는 고종 퇴위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한편 고종 양위를 주도한 이완용 등을 성토하였다. 7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그에게 특별히 외무부협판직을 제수하였으나 불민함을 이유로 고사하였다. 1908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영서원 원장과 겸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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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넘어 국악으로 마음을 공유한다제13회 장애인국악공연 ‘마음 나눔’이 오는 11월 1일 오전 10시30분 무안군 남악의 남도소리 울림터에서 열린다. 장애인 문화예술공동체 사람사랑에서 주최·주관하는 이 행사는 장애를 가진 예술인들에게 공연 기회를 마련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공연의 막을 열어줄 ‘같이 운다’는 의미의 공명(共鳴)은 숲속의 많은 새들이 각자의 소리로 자유롭지만 조화로운 자연의 소리를 표현한 곡으로, 연주하게 될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제13회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다음으로 전국장애인무용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소림학교 무용팀은 춘향이가 이 도령을 옥중에서 그리워하는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1585내드름은 장애인 음악치료의 목적으로 시작된 장애인 타악그룹으로 음악치료로 자신들을 치료하는 과정을 넘어 관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공연을 선보인다. 다음으로 판소리를 들려줄 김지연씨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승달장애인국악대제전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을 소리해준다. 축하공연으로 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보존회에서 '함께노는판 판굿'이라는 제목으로 관객과 공연자가 함께하는 무대로 공연의 막을 내린다. 부대행사로 ‘기부도 교육되어야 하고 생활이어야 한다’라는 한홍수 대표의 생각으로 공연 관람하는 아이들의 동전 나눔 기부행사가 전라남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열리고, 장애‧아동‧청소년 성 인권교육 홍보부스를 설치하여 장애인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성과 인권에 대해서 알리고자 하였다. 이번 행사는 전라남도, 전남문화관광재단, 전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목포시청소년성문화센터 등의 후원으로 이뤄지며, 공연은 누구나 무료로 관람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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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만 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한성준,1941년) 1941년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爾)>의 지은이 김태웅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圓覺社)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명창들이 백칠십 여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시기와 관련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띤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무안출신 강용환 국악명가 일명 강윤학 3대 국악명가라고 한다. 강윤학은 친척 강백천과 교우하며 남원 운봉 박만순에게 소리를 배운다. 아들 강용환(강용안이라고도 함, 1866~1938)은 정정열, 이동백과 교유했다. 어전광대(왕 앞에서 판소리하는 이)다. 의친왕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창극의 창시자로도 불린다. 강용환의 아들 강태홍(1891~1957)은 경주권번, 달성권번 등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창시했다. 부산지역 제자로 원옥화, 강남원, 박차경, 김춘지(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신명숙(부산시 무형문화재) 등이 있다. 강남중(1900~1972)은 숙부 강용환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오태석, 송만갑, 정정열 등을 사사했다. 일본에서 창극을 할 때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하여 고문을 당해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범 김구에게 오현(悟峴)이라는 호를 받는 등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강준안, 강태종 등 명인이 있다. 아쉽게도 강용환 사진자료 등이 전무하다.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에서 관련 창극 '명인의 봄'을 초연한 바 있다. 강윤학 집안의 3대 명인들을 모태로 출발 한 것이 무안 군립국악원이다. 현재는 3명의 상임단원과 6명의 비상임 단원뿐이지만 더 큰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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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전국장애인승달국악대전 대상을 수상한 임정은춤의 열정으로 넘어선 청각장애! 먼저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주최 측과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귀가 좋지 않아서 어린 나이 때부터 보청기를 착용하며 살아왔고 어린 나이에는 청각 장애인이라는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보청기를 끼고 있는 나의 모습을 사람들이 쳐다보는 그 자체가 너무나 싫었던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해서 상대방이 짜증내거나 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고 자신감이 없어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를 크게 좋아하지 않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유독 방송댄스 춤 추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의 장애를 전혀 모르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부모님 몰래 춤추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방송댄스로는 대학을 진학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고 17살부터 한국무용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의 곁에서 지원해 주시고 응원해 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힘든 시간 속에서 버티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가족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무용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딸이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멋지게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든든하게 응원해 주는 남편과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도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의 무용인생 22년이라는 시간 동안 옆에서 좋은 가르침을 주신 서보근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저의 춤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많이 존경합니다. 대회를 위해 애써주신 무안군수님, 무안 전국 승달장애인국악대제전 모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승달장애인국악대제전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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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무안 전국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06/03-04)‘한반도평화통일기원’ 2023년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 주최 : 무안군, 민주평화통일자문 무안군 협의회,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주관 :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보건복지부, 전라남도, 전남교육청, 무안신문 ■ 장소 : 무안승달문화예술회관 ■ 일시 : 2023-06-03∽04 오전 10시 ■ 경연일정 예 선 – 2023년 06월 03일 (토) 10:00 ~ 18:00 승달문화예술회관 본 선 - 2023년 06월 04일 (일) 10:00 ~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결 선 - 2023년 06월 04일 (일)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시상식 -2023년 06월 04일(일) 16:30 승달문화예술회관 ■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참가 자격 ① 청소년부 1.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생이나 19세미만까지 청소년부로 참여할 수 있음. 2. 만18세 이상일 경우 참가 당일 학생 신분이여야 하며 이를 증빙할 수 있어야함. ② 일반부 1. 19세 이상인 대학생 또는 일반인 장애인국악대제전은 참가부문 장애에 한합니다 (010-9211-7222 문의 부탁드립니다) ■ 참가신청 : 2023. 04. 01. - 05. 30.(오후 6시까지 / 6시 이후는 접수 불가합니다.) 우)58559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13 ☏ 061 - 285 - 1151 / 010- 9211-7222 메일 : wlseh53@hanmail.net 팩스접수 061 - 285 - 1152 / 0508-923-7227 (장애인국악대제전 전화접수 가능) ★ 단 장애인국악대제전 예선은 영상심사로 진행되오니 착오없이 영상을 메일로 첨부하여주십시오 ■ 경연시간 경연시간 청소년부 : 6분 일반부 : 8분 ■ 심사항목 (평화통일 가산점은 평화통일을 주제로 한 경연작품을 평가하는 항목) 한국무용부문 감정(10점) 기능(30점) 안무(30점) 무대음악(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국악성악부문 공력(25점) 음정(25점) 박자(20점) 무대매너(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기악부문 (관악, 현악) 공력(25점) 음정(25점) 박자(20점) 무대매너(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가야금병창부문 공력(25점) 음정(25점) 박자(20점) 무대매너(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전통연희부문 감정(10점) 기능(30점) 구성(30점) 무대매너(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판소리고법부문 박자(25점) 기능(35점) 자세(10점) 추임세(10점) 평화통일가산점(20점) ■ 지정고수: *장애인 청소년부- 예선⦁ 본선 각 50,000원, 결선 무료 * 장애인 일반부 - 예선⦁ 본선 결선 각 50,000원 지정고수를 이용하실 분은 참가신청서에 신청. (농협 351 - 0361 - 6391 – 23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2023년 장애인 승달국악대제전 시상계획 최종 수정일시 2023-05-018 오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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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 서산전국민요경창대회 수상자일반부 대상 (충청남도지사상) 이성호(배뱅이굿) 경기도 여주시 일반부 최우수상 (서산시장상) 신동호(흥타령) 전남 무안군 일반부 우수상 엄경화(농부가) 잔남 목포시 일반부 장려상 유경순(노랫가락 청춘가) 서울 송파구 일반부 장려상 서대희(노랫가락 창부타령) 충남 아산시 단체 대상 (서산시장) 김숙자외 6명 (농부가) 전남 목포시 단체 최우수상 김달선외 3명 (청춘가 닐릴리야 태평가)경기도 수원시 단체부 우수상 서대희외5명(장기타령) 충남 아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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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무안 전국 승달국악대제전 (06/03-04)■대회목적: 본 대회는 대한민국의 국악명가 강윤학家의 명인⦁명창 이신 강용안(최초로 전통창극과 창작창극을 연출하신 창극의효시, 창극으로 일제에 맞서 이인직의 은세계가 아닌 최병두타령으로 예술혼을 지킴), 강태홍(중요무형문화제 강태홍류 가야금창시자), 강남중(국악인으로 유일한 독립운동의 숨은애국자(상해임시정부의 구국이념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렸으며, 백범(김구)선생으로부터 悟峴(오현) 호를 받음, 일본에서 애국 운동을 하시다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청각을 잃어버림.) 선생들의 정신을 기리고, 전국의 국악인들을 발굴. 육성하여 권위 있는 신진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정착시키고 우수한 국악 인재를 발굴하여 훌륭한 전통 국악의 전승 보전과, 21세기를 맞아 우리 전통예술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과 세계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고자함. ■주최 : 무안군, 민주평화통일자문 무안군 협의회,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주관 :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후원 : 행자부, 문체부, 교육부, 농림부, 전라남도, 전남교육청, 무안신문 ■장소 : 무안승달문화예술회관 ■일시 : 2023-06-03∽04 ■ 경연일정 예선 – 2023년 06월 03일 (토) 10:00 ~ 18:00 승달문화예술회관 일원, 본선 - 2023년 06월 04일 (일) 10:00 ~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결선 - 2023년 06월 04일 (일) 15:30 승달문화예술회관 시상식 - 2023년 06월 04일 (일) 16:30 승달문화예술회관 ■ 승달국악대제전 참가자격 전국 초, 중, 고, 대학, 일반, 외국인 고법 신인부, 판소리 신인부, 무용 신인부는 대학생 및 전공자 참여 불가 (대학생 및 전공자 임이 확인될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 판소리 노인부, 고법 노인부는 65세 / 1959년 출생자부터 접수가능 본 대회 노인부, 신인부 종합대상 수상자는 수상 부서에 접수 불가. 단, 전년도 대회에서 동일부문 최고상(대통령상)수상자는 접수 불가. ■ 참가신청 : 2023. 04. 01. - 05. 30.(오후 6시까지 / 6시 이후는 접수 불가합니다.) 우)58559 전남 무안군 삼향읍 초의길13 ☏ 061 - 285 - 1151 / 010 - 9211 - 7222 메일 : wlseh53@hanmail.net 팩스접수 061 - 285 - 1152 / 0508-923-7227 (노인부∘신인부에 한해서 전화접수 가능) ■ 경연방법 : 본회의「운영(심사)규정」을 원칙으로 함. 학생부 : 예선⦁본선 무 장단 또는 고수 대동 (고수신청을 원할 경우 신청서에 신청하시거나 현장에서 신청가능) ■ 지정고수: * 학생부 - 예선⦁본선 각 50,000원, 결선 무료 * 신인 ∘ 노인부 - 예선⦁ 본선, 결선 각 50,000원 * 명인부 - 예선⦁본선 각 100,000 원, 결선 200,000 원 지정고수를 이용하실 분은 참가신청서에 신청. (농협 351 - 0361 - 6391 - 23 사)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 ■ 경연순서 : 예선, 본선「운영(심사)규정」을 원칙으로 함.(장애인부도 포함) ■ 경연시간 판소리 학생부 : 8분 신인부 : 8분 노인부 : 8분 명인부 : 10분 기악(관악, 현악) 학생부 : 8분 명인부 : 8분~10분 한국무용 학생부 : 5분~8분 신인부 : 6분 명인부 : 8분~10분 가야금병창 학생부 : 6분~8분 명인부 : 8분~10분 판소리고법 학생부 : 5분 신인부 : 5분 노인부 : 5분 명인부 : 8분 판소리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자유곡 (명인부·고등부 – 예선곡 본선불허 / 명인부 – 본선 중 선창자소리를 후 창자 소리불가) 기악(관악, 현악) 산조 한국무용 무용, 국가중요무형문화재·지방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전통춤 또는 지정되지않은 전통춤, 창작무용등 (무용출전자는 USB, CD등 저장매체 필히 지참하여함) 가야금병창 자유곡 (명인부·고등부 – 예선곡 본선불허 / 명인부 – 본선 중 선창자소리를 후 창자 소리불가) 판소리고법 학생부,신인부,노인부 – 중모리, 중중모리, 진양조 (장단의 배정이 바뀔 수 있음) 명인부 - 중모리, 중중모리, 진양조, 자진모리, 엇모리 (장단의 배정이 바뀔 수 있음) ■ 경연요령 ■ 심사항목 무용 감정 30 기능 30 안무 30 무대매너 10 판소리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기악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가야금병창 공력 30 음정 30 박자 30 무대매너 10 판소리고법 박자 30 기능 40 자세 15 추임새 15 o 예선,본선 후 전체 심사위원 점수 중 최고점 최하점을 뺀 후 점수를 합하여 가장 높은 점수부터 순위결정 o 결선 - 각 심사위원의 점수를 합하여 높은 점수가 대상(1등:2점. 2등1점) o 동점일 경우 고학년 및 고령자 및 다수 참가자로 함, 모두 같을시 심사위원 회의를 거쳐 심사위원장이 결 정한다. ■ 심사해피제 시행여부 : 해당사항에 체크 표시 ☑ 시행 미 시행 ■ 수상자의 사후관리 계획 :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무안 연꽃축제 메인무대 승달 국악 콘서트 초청공연 (매년개최하고있음)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개인발표회 후원 및 초청발표회 예정(후원신청 받고 있음) 개인 발표회 (대관료, 팜플렛 등 비용보조), 초청 개인발표회 (공연비 지급) 대통령상 수상자 심사위원 또는 판소리고법 명창 초청. 승달국악대제전 수상자 음반 발매예정. ■ 제21회 승달국악대제전 시상계획 등위 부문 내 용 시상훈격 시 상 금 시상 인원 계 명인부 현 악 관 악 판소리 무 용 가야금병창 판소리고법 종합대상 대통령상 15,000,000 (부상8,000,000) 1 23,000,000 (부상8,000,000) 종합최우수상 국무총리상 3,000,000 (부상4,000,000) 1 7,000,000 (부상4,000,000) 부문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1,000,000 (부상4,000,000) 4 20,000,000 (부상16,000,000) 최우수상 전라남도지사상 500,000 6 3,000,000 우 수 상 무안군수상 300,000 6 1,800,000 장 려 상 보존회이사장상 200,000 6 1,200,000 노인부 판소리 판소리고법 종합대상 국회의장상 500,000 (부상4,000,000) 1 4,500,000 (부상4,000,000) 대 상 전라남도지사상 500,000 1 500,000 최우수상 무안군수상 300,000 2 600,000 우 수 상 군의회의장상 200,000 2 400,000 장 려 상 보존회이사장상 100,000 2 200,000 신인부 무 용 판소리 판소리고법 종합대상 농림부장관상 500,000 (부상4,000,000) 1 4,500,000 (부상4,000,000) 대 상 전라남도지사상 500,000 2 1,000,000 최우수상 무안군수상 300,000 3 900,000 우 수 상 군의회의장상 200,000 3 600,000 장 려 상 보존회이사장상 100,000 3 300,000 학생부 현 악 관 악 판소리 무 용 가야금병창 판소리고법 학생부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500,000 (부상4,000,000) 1 4,500,000 (부상4,000,000) 대 상 전라남도교육감상 400,000 6 2,400,000 최우수상 무안군교육장상 300,000 6 1,800,000 우 수 상 군의회의장상 200,000 6 1,200,000 장 려 상 보존회이사장상 100,000 6 6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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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일제강점기 야마다만키치로우(山田萬吉郞)라는 일본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여를 무안지역에 살면서 가마터와 분청사기를 연구했다. '미시마하끼메(三島刷毛目)'란 이름의 책이다. 무안문화원에서 무양향토문화총서 9호로 '야마다만키치로우가 바라본 무안분청사기 귀얄문'(2020년)이라는 번역본을 출간했다. '삼도'는 분청(粉淸)을, 쇄모(刷毛)는 귀얄을 말한다. 분청은 조선시대 자기의 하나다. 청자에 백토로 분을 발라 다시 구워낸 양식이다. 회청색 혹은 회황색을 띤다. 귀얄은 풀이나 옻칠할 때 쓰는 솔의 하나로 수수붓이라고도 한다.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서 만들기에 그 문양이 투박한 느낌을 준다. 책의 목차들을 보니 무안의 분청, 무안출토 분청 고찰, 무안분청을 통해서 본 조선도자기 등 모두 무안지역의 분청사기를 추적하고 분석한 글들이다. 무안지역이 분청사기의 중심이었다는 뜻일까? 하지만 당시의 무안분청은 광주군(광주시), 보성군, 나주군, 함평군, 무안군 등을 포괄하는 광역 개념이다.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던 무안분청은 사실상 영산강 일대의 분청이었던 것이다. 이들 지역을 포괄하는 맥락으로 호명하였으니 영산강 분청사기의 핵심이 무안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안분청일까 영산강분청일까? 조선 분청사기의 성립과 삼도(三島, 미시마)의 발산 조선분청사기의 요모조모를 개괄적으로 풀이해둔 연구가 있다. 「조선분청사기 '귀얄문'에 나타난 직관적 '즉흥성'에 관한 연구」(방창현, 이헌국, 2014)가 그것이다. 여기 그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고려시대에는 상감청자가 유행했다. 상감(象嵌)은 금속이나 도자기, 목재 따위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따위를 박아 넣는 공예기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감청자와 나전칠기가 발달했다. 근대기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자개농이 상감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분청사기가 발달한다. 청자의 시문기법을 계승한 양식이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Misima, 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조선에서 자생한 고유양식은 아니고 중국 육조 후기인 6세기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문기법이 조선의 것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삼강기법이나 분청 즉 귀얄기법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은 조선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종 이후에는 주로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 등 모두 324개의 도자소'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중반 지배층 사이에서 백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관요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백자의 수요가 급증하자 분청사기의 생산은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에 의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되고 전수된다. 16세기 후반 야마노우에소지(山上宗二)는 조선의 분청 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 있는데 이 중 귀얄기법을 가장 선호하였던 것 같다. 무안분청의 세계관과 서민예술로서의 미학 무안분청의 세계관을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위 논문을 쓴 방창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맥락으로 분청의 세계관을 분석한다. 이것이 회화로 바뀌면 달마도처럼 직관적인 표현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낸다.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공(空), 도교에서의 자유의지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사기에 표현되었으니 그 융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의 지배층을 통해 세계 최고의 다완(tea bowl)로 인정받은 조선의 분청사기, 특히 무안분청이 일본의 차문화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인규에 의하면 미국과 캐나다의 도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의 다완을 동양미의식을 넘어 종교와 사상의 차원으로 끄집어 올린다. 오래 전 내가 도쿄 외곽의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야나기가 종교와 사상으로 확대시킨 분청과 옹기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무안분청의 기능을 배태한 영산강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여기 표현된 도교적 자유의지나 불교적 공(空)의 심미안은 영산강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의 지향 속에 생성된 것들이다. 내식으로 말하면 남도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어찌 무안분청이 뿌리 없이 생겼겠는가.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일 것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청자, 무엇보다 영산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작품들과 세라믹산업의 세계들 말이다. 남도인문학팁무안분청에서 생활도자 세라믹산업까지 강진청자, 여주백자와 함께 무안분청을 우리나라 3대 도자기 발상지라 한다. 무안과 목포는 분청과 옹기 등 생활자기, 강진은 청자 중심지다. 이외 해남은 초기청자의 발상지, 영암은 도기로 특화되어 있다. '목포대학교헬스케어도자명품화사업단(단장 조영석 교수)'에 의하면 무안지역 도자산업벨트는 전국 최대의 생활도자클러스터다. 양질의 점토와 풍부한 땔감, 무엇보다 영산강을 활용한 해상운송로의 특질을 배경삼아 발현했던 무안분청이 목포의 행남자기로 이어지며 오늘날 생활도자클러스터를 이뤘던 것이다. 행남자기가 이전해가긴 했지만, 도자기의 일관 체계를 갖춘 전국 유일의 특성화지역이고 10인 이상의 도자업체 중 전국의 55%, 전남의 80%가 무안지역에 집중해있다. 전남도에서 역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는 남도문예르네상스 조성사업 중 하나가 도자와 차라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도자기산업은 인공치아는 물론 세라믹 일반으로, 건축물에서 첨단공업제품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히 차의 중흥조이자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무안군 삼향 출생)와 관련되어 있으니 도자산업과 차산업은 일석삼조의 콘텐츠이자 향토산업인 셈이다. 지역문화 창발과 재구성의 임무를 맡은 곳은 어디일까. 영산강 토대의 유구한 무안분청을 토대삼고 제4차산업혁명의 시대 첨단산업까지 이끌어내는 곳 아니겠는가. 남도의 르네상스 그 중흥의 역사를 선도해나갈 클러스터, 목포대학을 중심으로 한 관학산업계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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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2)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 자치시대의 한국 지역학 "지역이라는 개념은 서울과 진도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따라서 지역학이라 함은 중앙에 예속된 특정 지역을 연구하거나혹은 순수하게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 "한국에서는 근래에 와서야 국가와 중앙에 종속된 지방사 연구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다. 지리지와 읍지, 지방지 편찬의 오랜 역사가 강고한 지방사의 전통을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는 중앙집권적 질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여지가 별로 없었고,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결집하되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무시하도록 강요했던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허영란의 「지방사를 넘어, 지역사로의 전환-한국 근대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새로운 모색」(지방사와 지방문화, 2017)이란 글의 시작 대목이다. 국어사전에는 지방(地方)을 서울 이외의 지역 혹은 중앙의 지도를 받는 아래 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중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고장이나 시골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지역(地域)은 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 혹은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을 말한다. 서울도 하나의 지역이요 내 고향 진도도 하나의 지역이다. 지방이라는 개념이 서울을 상위 영역으로, 진도를 하위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지역이라는 개념은 서울과 진도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지역학이라 함은 중앙에 예속된 특정 지역을 연구하거나 혹은 순수하게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선다.지방학을 넘어 지역학으로, 문화 자치시대의 한국지역학지역학은 세계지역학 한국지역학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동아시아학, 유럽학, 중국학, 일본학 등 각 나라와 세계 지역을 망라하는 연구를 말한다. 후자의 지역학은 현재 우후죽순 범람하고 있는 각 시도, 군, 면 단위의 연구 움직임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초에 지역학과 정맥(靜脈)도시라는 개념을 본 지면에 소개했다(2023. 1. 6). 좌계 김영래 선생의 제안을 담론화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까. 아직은 반향이 없는 듯한데, 대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맥 사회의 폐단을 극복하고 광범위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중심의 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매우 긴요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관련 논의들을 모아 펴낸 책이 「문화자치시대의 한국지역학」(다할미디어)이다. 전국 석학 13분이 참여하였다. 2021년과 2022년 무안문화원에서 주최한 학술회의 발표자료와 관련 논고들을 모은 것이다. 나를 포함해 이해준(공주대 명예교수), 윤명철(동국대 명예교수), 나승만(전 목포대 교수), 이창식(세명대 교수), 강진갑(전 경기대 교수),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허남춘(제주대 교수), 천득염(한국학호남진흥원장), 강신겸(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박상일(지방분권전남연대 이사장), 김희태(전 전남도문화재위원), 윤여정(나주문화원장)이 참여하였다. 집필진의 구성이 흥미롭다. 연구자, 현장운동가, 전문가 등이 고루 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을 앞세우는 학자들만의 주장이 아니요, 이론 없는 현장운동가들의 메아리만도 아니다. 장차 지역학이 이끌고 가야 할 한 모델일 수 있을 것이다. 무안문화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출간을 주도한 이윤선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에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해륙의 첫 관문이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며 남도지역이고 무안이라고 정리했다. 반도를 해만(海灣)으로 바꾸어 읽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골을 따라 시선을 바꾸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작은 고을 무안에서 전국으로 발신하는 이 책의 의미가 크다.” ‘물 아래 무안에서 발신하는’이라고 부제를 걸어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 무안뿐이겠는가. 각 지역을 무안에 대입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지역학 한국의 지역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동저자 김희태의 원고 「전남의 지역학 연구, 성과와 전망」편을 인용하고 내가 좀 더 추가하여 아래에 정리해뒀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지역학회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다. 1963. 전남대 호남학연구원-호남학/ 1978. 제주도연구회-제주학/ 1983. 전라문화연구소-전북학/ 1986. 전라남도-남도학/ 1993.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서울학/ 1994. 강원발전연구원-강원학/ 1994. 장흥학당-장흥학/ 1997, 경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1998. 연세대 원주갬퍼스 메지연구소-원주학/ 1998, 1999. (재)충북개발연구원-충북학/ 1999, 2002. 인천학연구소,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인천학/ 2000. 진도학회-진도학/ 2000. 성결대 안양학연구소-안양학/ 2000.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영남학/ 2001. 한남대 대덕학연구소-대덕학/ 2001. 관동대 인문과학연구소-강릉학/ 2001, 2002. 신라대 부산학연구센터-부산학/ 2003 한국국학진흥원-안동학/ 2004. 대전학연구회-대전학/ 2004. 순천시-순천학/ 2004. 수원문화원 수원학연구소-수원학/ 2004. 강남대 용인발전연구센터-용인학/ 2005. 대구경북연구원-경북학/ 2005. 전주역사박물관-전주학/ 2006. 울산학연구센터-울산학/ 2006. 경남학연구센터-경남학/ 2007. (재)충남역사문화연구원-충청학/ 2008. 천안발전연구원-천안학/ 2011. 여수시-여수학/ 2012. 군산시, 군산대학교-군산학/ 2012. 정읍학연구회-정읍학/ 2012. 부여군-부여학/ 2013. 수원시정연구원, 경기대학교-수원학/ 2014. 충남평생교육진흥원-충남학/ 2014. 곡성문화원-곡성학/ 2015. 연세대 국학연구원 부설 강진다산실학연구원-강진학/ 2015. 공주대 공주학연구원-공주학/ 2016. (사)보성학연구소-보성학/ 2016. 상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2016. 충주중원문화재단-충주학/ 2016. 광양문화원 과양학연구소-광양학/ 2017. 청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2017. 원광대 익산학연구소-익산학/ 2018. 광주시문화재단-광주학/ 2018. 목포시-목포학/ 2018. 화순향교-화순학/ 2019. 해남군-해남학/ 2000. 나주학회(나주문화원)-나주학......2021. 무안문화원-무안학 등이다. 여기에 정리한 것보다 훨씬 많은 지역학이 속속 생성되는 중이므로, 이 데이터는 계속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제3의 장소, 관계로서의 지역, 고향사랑기부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역은 굳이 행정구역이나 고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3의 장소’, 관계로서의 지역을 포괄한다. 이시야마 노부타카 편저, 『로컬의 발견-제3의 장소와 관계인구』(더가능연구소, 2021)에서 인용하여 설명했다. 이시야마는 지역을 이렇게 정의한다. "참여하고 싶은 애착을 느끼고, 역사와 문화 등에서 통일성 있는 일정한 구역” 즉 첫째는 거주지이고 둘째는 고향이며 셋째는 거주지나 고향은 아니어도 무언가 관계있거나 응원하는 곳을 ‘지역’이라 말한다. 느슨하게 관계하는 지역인 셈인데 이 중에서 더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응원하는 지역’이다. 옛날에 비해 대도시 출생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고향사랑기부제>도 유사한 개념이다. 개인의 자발적 기부를 통해 지방재정을 확충하거나 지역간 재정 격차를 완화하고, 지역특산품 등을 답례품으로 제공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제도다. 물론 지역의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는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함)의 애착이 관계로서의 고향으로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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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자치 시대의 한국 지역학'지역자치의 시대, 작은 고을 무안에서 ‘지역학’을 묻다 무안이란 지명의 어원은 물아래 혹은 물안이라고 한다. 물아래 혹은 물안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산강과 서해의 물과 바다를 뜻한다. 무안을 물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해양의 시대, 섬의 시대, 더욱이 지역분권과 자치의 시대, 지역학이 대세를 이루는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무안에서 지역학을 발신한다. 예사롭지 않다.이 책은 2021년과 2022년 두 차례 열린 지역학 학술회의의 결과를 합치고, 집필했던 관련 논고를 모아 펴낸 것이다. 무안문화원이 기획하고, 이윤선⦁이해준⦁윤명철⦁나승만⦁이창식⦁강진갑⦁송화섭⦁허남춘⦁천득염⦁강신겸⦁박상일⦁김희태⦁윤여정 등 다수의 학자가 참여했다. 무안향토문화총서 제12호로 발간됐다.출간을 주도한 이윤선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에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해륙의 첫 관문이 바로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며 남도지역이고 무안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반도를 해만으로 바꾸어 읽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골을 따라 시선을 바꾸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리라. 그런 점에서 작은 고을 무안에서 전국으로 발신하는 이 책은 의미가 크다. 서울 어느 권위 있는 기관이 아닌 무안문화원에서 한국의 지역학이란 책을 발간한 것이, 지역자치와 문화분권의 의미에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무안을 각자의 지역으로 바꾸어 보면 그 의미의 무게에 더욱 공감할 것으로 본다. 저자 이윤선 민속학자는 (사)서남해안포럼이사장으로서, 무안지역학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심포지움과 함께 이 책을 기획했다. 저서로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 『남도를 품은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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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 민속문화재 등록문화재청은 20일 분암 성격의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는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무의공 박의장(1555∼1615)을 기리려고 세운 분암 성격의 재사건축이다.분암은 묘 주변에 사찰을 세워 승려가 묘소를 지키게 하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기 위해 건립한 암자다.전면에는 '덕후루(德厚樓)'라는 편액이 걸린 누문이 있다. 안쪽은 '집희암(集喜庵)'이란 편액이 걸린 재사가 있다. 덕후루와 집희암 사이는 좌우에 딸린 방인 익실이 연결되어 있다.전체 배치 형태는 경북 북부지역의 ㅁ자형 건물로, 지역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문루인 덕후루는 중층 누각 건물로 양측 퇴칸에는 위층 온돌방의 구들을 놓았댜. 그 형태가 소위, 고상식(高床式)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맞배지붕 양쪽에 가첨 지붕을 달아낸 집희암도 이 지역 건축의 조형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고, 실내 천장에 우물마루 형태로 나무반자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가첨 지붕은 맞배지붕 측면에 덧붙여진 한쪽으로 경사진 지붕이고 반자는 지붕 밑이나 위층 바닥 밑을 편평하게 하여 치장한 각 방의 천장이다. 이밖에, 좌우 익랑채는 온달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부속시설로 집희암과 덕후루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특히,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는 분암으로서의 성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재사건축이자 불교식 묘제사에서 유교식 묘제사로 넘어가는 의례복합공간으로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고스란히 담은 문화유산이다.문화재청은 영덕 무안박씨 희암재사를 체계적 보존과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의 활용을 위해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 등과 협력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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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 나주에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 행사였다. 이경엽 교수와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발표를 통해 그간 묻혀있던 보물 같은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토론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짚어봤다. 이경엽은 1937년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공저 '조선무속연구'를 통해 나주신청에 보관되어 있던 여섯 종류의 문서를 설명해주었다. 선생안(1800년)과 절목(1882년), 대동보안(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선생안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길(1834~1903)과 정원실(1838~?)이다. 정원길은 정재근의 아버지다. 정재근은 박유전을 시조삼고 있는 서편제를 보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 정응민 대에 이르러 판소리의 중흥기라고나 할까, 이른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불리는 서편제의 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안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 후기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종 40주년 칭경식의 대표를 맡아 행한 업적들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협률사가 설립되었는데 전국의 판소리 명창,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고 공연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때 합류하거나 소속되었던 예인들의 창발이 오늘날 전통음악을 재구성하는 큰 흐름이었다는 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협률사와 이후 연계되는 원각사의 명암들이 짙은데, 무안사람 강용안과 더불어 만든 창극이며 삼현육각 등 관련한 자료와 인물연대기는 따로 후술하겠다. 어쨌든 정원길의 대를 이은 정재근이 정응민과 정권진으로 다시 안채봉,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으로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의 획기적인 인물 정창업의 예술을 정학진과 김창환이 이어받아 김봉이, 김봉학으로 다시 오수암, 정광수, 임방울 등으로 이었다는 점 괄목할 만한 풍경이다. 가히 서편제의 맥을 나주신청에서 총괄하고 확산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잇는 안기옥과 정남희 등은 월북하여 북한 전통음악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의 트로트나 가요로 확산된 맥락도 흥미롭다. 천년도읍지라는 점을 떠나서도 나주신청의 개관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막중하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맥을 좇아 전남도립국안단은 물론, 진도, 여수, 무안 등지의 예술단과의 네트워크, 미래전략으로서의 연구와 공연 확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을 누구보다 축하한다. 남도의 음악을 넘어 우리나라 나아가 아시아의 음악을 총괄하고 확산하는 센터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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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정철호국악제, 종합대상 대통령상에 정숙 명창 수상소감제23회 청강정철호국악제, 종합대상 대통령상에는 정숙 명창이 수상을 했다. 본지에 수상소감을 전해주었다. "전남 무안에서 초등학교 5학년때 소리에 입문하여 결혼 후 잠시 쉰 몇년을 제외하고 불러댔던 판소리, 인고의 세월을 마다 않고 눈물로 완창 발표를 마칠때, 흐르던 눈물과, 존경했던 청강 정철호 선생님 전국대전 대통령상 발표때 흐르던 눈물이 겹치며 내가 살아온 세월 중 가장 감명 깊은 날이였습니다. 매일 수없이 연습을 반복하여 성대가 부어올라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모진 고통속에서도 후회없는 대회를 위해 연습을 하던 그때가 오늘의 영광을 위했던 것 같습니다. 청강 정철호 선생님의 국악제 대통령상을 받은 제자로 누가 되지 않도록 국악부흥에 이바지 하는 예술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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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 중심으로 문화재청 공모사업 신청 국비 1억원 확보,경남 밀양시는 문화재청 주관 '2023 지역 무형유산 보호지원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고 16일 밝혔다.문화재청은 매년 공모를 통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국가와 시·도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지속 가능한 전승 활용 기반을 마련하는 '지역 무형유산 보호지원사업' 대상지를 선정하고 있다.시는 밀양아리랑을 중심으로 지역 무형문화유산 활용 방안 신청서를 제출해 높은 평가를 받으며 국비 1억원 포함, 총 3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게 됐다.내년에는 밀양아리랑을 주제로 지역 무형유산 행정 역량 강화와 학술대회 개최, 무형유산 협력 네트워크 구축, 관광 자원화와 홍보 콘텐츠 개발 등 다양한 세부 사업을 시행하게 된다.아리랑과 국가무형문화재인 백중놀이,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법흥상원놀이, 작약산 예수재를 비롯한 비지정 무형문화재의 가치 실현 방안까지 포괄하고 있어 지역 문화유산 역량 강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시 관계자는 "이번 공모사업 선정을 계기로 지역 대표 문화브랜드인 밀양아리랑이 대한민국 무형문화재의 중심이 되고, 시가 부·울·경 무형문화재 활성화 허브 도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삼문동은 옛 법원·검찰청 대지에 국립무형유산원 밀양분원과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을 건립 중으로 아리랑의 고장 밀양이 명실상부한 전통 무형유산 도시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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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등용문, 김창조 가야금 전국대회 대상에 김지원 씨지난 4일 전남 영암군에서 '제11회 영암 김창조 가야금 전국대회'가 가야금 산조의 본향인 영암군 가야금산조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김창조산조보존회와 한국산조학회가 주최하고 ㈔김죽파양승희가야금산조보존회가 주관하는 전국대회는 한국 음악사에 남긴 김창조의 위업을 기리고 널리 선양하는 사업의 하나다.경연대회는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 두 분야이며,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109팀 참가자들이 경연을 벌렸다. 초·중등부와 고등부, 일반부 예선은 9월3일 비대면 동영상으로 심사하고, 고등부와 일반부 본선은 9월4일 현장 대면심사를 통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상금 1000만원), 교육부 장관상(상금 500만원) 등이 수여되었다. 일반부 산조 종합대상에는 한국종합예술대학교 1학년 김지원, 가야금 병창 대상에는 전남대학교 4학년 정다솔이 각각 수상했다. 고등부 산조 종합대상에는 국립국악고등학교 2학년 박다빈, 가야금병창 대상에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1학년 유하영, 초등부 산조 대상에는 미르초등학교 4학년 임규도. 가야금병창 대상에는 무안초등학교 6학년 박예나, 중등부 산조 대상에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2학년 김윤아가야금병창 대상에는 국립전통예술중학교 1학년 차다연이 수상했다. (사)김창조산조보존회 양승희 이사장은 2016년 영암군(전동평 군수)과 전남 교육청(장만채 교육감)의 지원으로 영암 초.중.고생들에게 가야금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영암어린이가야금연주단'을 결성하여 매년 가야금산조 기념관에서 교육과 공연을 통해 가야금산조를 널리 알리고 있다. 축하 무대도 이루어져서 개막 공연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의 디바 안숙선 명창, 판소리 예능보유자, 김수연 명창,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 명창, 민의식 명예교수, '가야금산조' 예능보유자 양승희 명인 등이 신명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양승희 이사장은 "국악 명인 등용문으로 널리 알려진 이 대회가 벌써 11돐이다. 이 행사를 열어주신 영암군에게 감사를 드린다.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 가야금산조가 자손만대에 전해지길 바란다.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가야금산조'가 등재되는 것이다."라고 전했다. 우승희 영암군수는 축사에서 "영암에서 개최된 이번 국악대전에서 격조 높은 공연과 함께 우리 소리의 멋과 낭만이 한데 어우러지는 국악 한마당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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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홍주전국국악경연대회 수상자 명단(46명)전공부 상 격 종 목 상 번 성 명 주 소 (소 속) 종합대상 (국무총리상) 무용 장소영 서울시 종합최수우상 (문체부장관상) 성악 정경희 전남 목포시 대상 (충남도지사상) 기악 정지송 경기도 안성시 사물 풍물 유소현 경기도 평택시 최우수상 (홍성군수상) 무용 김한샘 충남 천안시 기악 이건희 서울시 서대문구 성악 임하정 경기도 성남시 사물 풍물 김유찬 광주시 우수상 (홍성군의회 의장상) 무용 임혜지 서울시 기악 공경환 서울시 성악 이지희 서울시 사물 풍물 변우택 경기도 안성시 장려상 (이사장상) 무용 이현애외2 경기도 부천시 기악 구슬아 전북 전주시 성악 김홍락 서울시 사물 풍물 이우빈 경북 구미시 사단법인 홍주전통예술보존회 신인부 상 격 종 목 상 번 성 명 주 소 (소 속) 종합대상 (국회의장상) 성악 정미덕 경기도 평택시 종합최수우상 (충남도지사상) 사물 풍물 정민우 서울시 대상 (충남도의회의장상) 기악 백설화 경기도 고양시 무용 박미희 대구시 최우수상 (홍성군수상) 무용 황일선 전북 군산시 기악 고은채 서울시 성악 박심업 광주시 사물 풍물 표혜정 인천시 우수상 (홍성군의회 의장상) 무용 임말년 전북 군산시 기악 현영희 경기도 용인시 성악 서진순 서울시 사물 풍물 김미경외5 서울시 장려상 (이사장상) 무용 오현옥 전북 군산시 기악 강태선 서울시 성악 송오선 광주시 사물 풍물 노명희외3 대전시 학생부 상 격 종 목 상 번 성 명 주 소 (소 속) 종합대상 (교육부장관상) 성악 김다현 서울시 대상 (홍성군수상) 무용 남가영 경남 김해시 기악 천서영 서울시 사물 풍물 김태현 경기도 시흥시 최우수상 (대회장상) 무용 이원권 전남 무안군 기악 박서현 서울시 성악 김가율 광주시 사물 풍물 조민형 서울시 우수상 (홍성군교육장상) 무용 현민서 경남 김해시 기악 정지민 경기도 화성시 성악 장무영 전남 목포시 사물 풍물 송민결 전북 군산시 장려상 이사장상 무용 박송하 부산시 기장군 이주연 대전시 기악 도경주 충남 아산시 강근영 서울시 성악 김도연 경남 김해시 손명준 경남 창원시 사물 풍물 김성현 경기도 시흥시 신지우 충북 청주시 사단법인 홍주전통예술보존회